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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삼국 사기에 등장하는 미추홀 요즘 도시 별 미추홀이라는 말

by foodmoney1000 2023. 7. 21.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미추홀 요즘 도시별 미추홀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요 그 유래를 알아보겠습니다.

십제에서 백제로 온조의 나라 세우기

기원전 1세기말 부여 출신의 주몽이 졸본 땅으로 와서 새로운 나라 고구려를 세웁니다. 여기에는 졸본의 지배자의 딸과 혼인한 것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둘 사이에 아들 둘을 두었는데 그게 바로 비류와 온조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몽이 부여에서 낳았던 큰아들 유리가 고구려로 찾아와 태자의 자리에 오릅니다. 주몽은 부여에 있을 때 이미 혼인했던 것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비류와 온조는 자신을 따르는 신하와 백성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떠났습니다. 마침내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산에 이르러 신하들이 한 목소리로 고했습니다. 이 땅은 북쪽으로 한강을 띠처럼 들렀고 동쪽에는 높은 산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이 자리 잡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가 막혔으니 , 이는 하늘이 내려 준 형세입니다. 여기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동생 온조는 이 말을 따랐으나 형 비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새로운 나라를 바닷가에 세우고 싶어 했습니다. 결국 형제는 백성을 둘로 나눠 비류는 미추홀로 떠나고 온조는 강 남쪽에 위례성을 세웁니다. 하지만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짠 탓에 비류는 고생만 하다가 숨을 거두고 남은 백성들은 살기 좋은 위례성으로 옮겨서 온조가 세운 나라에 합류합니다. 온조가 지은 나라의 이름은 원래 심제였는데 나중에 백성들이 즐겨 따랐다고 하여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바꾸었다고 합니다. 이른바 온조 백제의 탄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온조백제 대 비류백제

그런데 삼국사기는 바로이어 또 다른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온조가 아니라 비류입니다. 비류가 세운 백제 즉 비류백제의 건국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어째 , 이야기가 얼핏 비슷하면서도 사뭇 다르죠? 이는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이 당시 전해오는 백제의 건국 이야기들을 수집해서 썼기 때문입니다. 둘 다 정확한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건국신화에 가까운 이야기였기에 어느 것이 옳은지 따져보는 대신 두 가지 이야기를 다 쓴 겁니다. 대 부분이 온조 백제만을 다루고 있어서 아마도 비류 백제는 조금 생소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백제의 시조는 온조일까요, 비류일까요? 대다수 분들이 위례성에 자리 잡은 온조 집단과 미추홀을 근거지로 한 비류 집단이 힘을 합쳐 백제를 세웠다고 생각합니다. 이 과정에서 온조를 시조로 하는 건국 이야기뿐만 아니라 비류가 주인공인 이야기도 따로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또한 이 두 집단은 모두 북쪽의 부여에서 갈라져 내려온 세력으로 보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의 기록과 함께 백제 왕들이 성이 부여씨였다는 사실을 근거로 삼았습니다.

비류가 미추홀에 자리 잡은 까닭은?

비류 집단이 미추홀에 자리를 잡은 것은 해상 활동을 위해서였을 겁니다. 옛날부터 인천을 중심으로 강화도와 인근 섬들이 바닷길로 이어져 있어 그랬을 겁니다. 영종도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발견된 흑요석 도구와 토기들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이것들은 다른 곳에서 만들어져 배로 운반된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미추홀이 바닷가라 소금을 구하기 쉬운 것도 비류집단의 정착이유가 되었을 겁니다. 더불어 온조 집단이 비류집단과 손을 잡은 것도 해상활동과 소금 확보를 위해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온조 집단이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이유는 삼국사기에 나온 그대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배산임수의 지형과 평야, 그리고 바다, 조선왕조 또한 비슷한 이유로 서울에 도읍을 정했으니까요. 위례성의 위치는 지금의 서울시 송파구의 풍납토성일대로 보입니다. 풍납토성은 기원전 2세기 무렵 만들어진 거대한 토성으로 여기서 초기 백제유물이 쏟아져 나왔거든요. 비류백제의 도읍이었던 미추홀은 현재 인천의 문학산성일대로 추정됩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인천군의 남쪽 2리에 남산석정이 있다고 기록된 후 동사강목과 여지도서, 경기읍지등에서 문학산성을 비류의성이라고 적었습니다. 이란  인식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문학산성은 해발 224미터의 문학산 정상에 자리 잡은 둘레 577미터의 자그마한 석성입니다. 처음에는 토성으로 세웠다가 나중에 석성으로 개축한 것으로 보입니다. 성안에는 흙으로 쌓은 내성과 봉수대, 우물집등이 있었습니다. 삼국시대 초기의 도읍은 평지가 아니라 이처럼 야트막한 산이나 구릉 위에 자리 잡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문학산성은 가가운곳에 소금을 생산하기 좋은 갯벌이 있어서 입지가 더 좋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학산일재에서 고인돌 12기를 비롯한 청동기와 초기 철기 시대의 유물유적들이 나오면서 문학산성 미추홀 중심지설은 더욱 설득력을 얻었습니다. 문학산성이 미추홀의 중심지가 아니라 하더라도 목지국을 비롯한 마한 소국중 하나의 중심지로 보기에는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