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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백제와 고구려에 이어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

by foodmoney1000 2023. 7. 23.

백제와 고구려에 이어 한강유역을 차지한 신라는 이 지역의 통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입니다. 진흥왕은 북한산까지 순행 즉 임금이 나라 안을 두루 살피며 돌아다니던 일 하여 순수비를 세우고 북한산주와 중원소경을 설치하여 왕족과 부자들을 옮겨 살게 했습니다. 이러한 조치들은 새로 확보한 한강 유역을 삼국 통일의 전진기지로 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고구려의 매소홀에서 신라의 소성현으로

한반도의 중심부에 위치한 한강유역은 예로부터 정치와 경제, 문화의 심장부였습니다. 앞서 삼국사기의 온조백제 건국 이야기에 나왔듯이 이 지역은 북쪽과 동쪽이 산악으로 둘러졌고 서쪽이 바다에 면하여 남쪽에 평야까지 어우러진 천혜의 분지였습니다. 특히 한강 하류의 비옥한 평야와 풍부한 인적자원은 이 지역 정치발전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또한 이 지역은 한반도 남부와 북부 문화의 경계 지여서 두 문화를 융합할 수 있었고 서해를 통해 일찍부터 앞선 중국 문물을 수입할 수도 있었습니다. 함마디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고 할까요? 따라서 한강유역을 확보하기 위해 삼국은 일찍부터 총력을 기울였던 것입니다..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발전이 뒤졌지만 한강유역을 확보하면서 삼국통일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습니다. 백제와 고구려가 압박했으나 신라는 한강유역을 굳건히 지켜졌고 결국 이 지역을 통해 교류하던 중국의 당과 손을 잡고 삼국통일을 이루게 됩니다. 총일 이후 신라는 넓어진 영토를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서 행정제도를 개편합니다. 전국을 9개의 지방으로 나누고 5개의 작은 수도 소경을 두었는데 이를 9주 5 소경이라 부릅니다.. 이때 신라의 9주 가운데 가장 큰 한산주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고구려가 다스릴 때의 지명인 매소홀에서 소성현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완도는 청해진과 강화도는 혈구진

신라는 삼국통일의 파트너였던 중국의 당나라와 적극적인 외교를 이어 갔습니다. 대규모 방문사절단인 견당사를 100여 차례 이상 파견하여 문물을 교류했습니다. 서라벌 지금의 경주를 출발한 견당사는 서해안까지 육로를 이용한 뒤 배를 타고 산둥반도로 들어가서 다시 당의 수도인 장안까지 육로로 갔습니다. 이때 황해를 지나 중국으로 가는 뱃길은 모두 세 갈래였습니다.. 황해 북쪽 육지를 다라 가까운 바다로 이동하는 연안항로, 황해 중부를 가르는 횡단항로, 황해남부의 사단항로가 그것이었습니다. 이중 북부 연안항로와 중부횡단항로는 인천 앞바다를 이용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출발지는 인천보다 아래쪽에 있던 당은포였습니다. 황해 북부의 연안항로는 육지에서 가가운 바닷길이라 난파나 조난의 위험이 적었습니다. 덕분에 일찍부터 한반도 남부와 중국을 잇는 해상교통로로 이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발생되었습니다. 뱃길 가까운 육지나 섬에 숨어있던 해적들이 자주 출몰했습니다. 이들은 배에 실린 귀한 물건들을 빼앗고 선원들을 노에로 끌고 갔습니다. 신라는 해적을 막기 위해 바닷길 곳곳에 군진을 만들고 수군을 배치했습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해상왕 장보고의 근거지였던 완도의 청해진입니다. 어린 시절 당으로 건너가 그곳에 군인이 되었던 장보고가 노예로 팔려오는 신라인들을 보고 귀국해서 흥덕왕에게 청해진 설치를 건의했다고 합니다. 청해진 이전에도 신라는 외적을 막기 위해 바닷가에 군진을 설치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이미 3세기 초에 경북선산 부근에 우두진을 만들어 백제 세력을 견제하였고, 5세기에는 왜구를 막기 위해 임해진, 장명진, 장봉진 등을 잇따라 동해안에 설치했습니다. 장보고의 청해진이 남해의 해적을 효과적으로 소탕하자, 서해안을 지키기 위해 진과 혈구진을 만들었습니다. 가장 늦게설치된 혈구진은 서해안의 해상교통요지인 강화도에 자리 잡은 덕분에 중국과의 안전한 교류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