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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견당사를 파견하던 통일신라는 8세기 중반 경덕왕을 고비로 내리막길

by foodmoney1000 2023. 7. 24.

견당사를 파견하던 통일 신라는 8세기 중반 경덕왕을 고비로 내리막길에 접어듭니다. 중앙 귀족들의 권력 쟁탈전이 서로 를 죽고 죽이는 전쟁으로 치달았던 탓이었습니다. 신라 말기 왕들의 평균 재위기간은 10년이 안될 정도로 빨리 바뀌었습니다. 그만큼 암살과 반란이 잦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앙의 정치가 혼란해지니 지방의 유력자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들은 독자적인 세력을 갖추고 자기 지역을 통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른바 호족의 등장이었습니다. 통일신라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해상호족과 왕건 고려를 세우다

신라말의 호족은 크게 세 가지 부류로 구분됩니다. 첫째 부류는 중앙의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지방으로 내려가서 자기 세력을 키운 귀족들입니다. 이들은 지방을 기반으로 반란을 일으켜 왕권에 도전했습니다. 유력한 중앙 귀족으로 활약하다 지방으로 쫓겨났다가 반란을 일으킨 후 새로운 나라를 선포한 심헌창이 대표적입니다.. 김헌창은 삽시간에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일대를 장악했지만 결국 중앙의 토벌군에게 진압되면서 자결하고 맙니다. 수십 년 뒤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 또한 버려진 신라 왕자를 자쳐했으나 그 말이 사실이라면 몰락 귀족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었겠죠. 두 번째는 해상을 통해 재력과 무력을 쌓은 부류입니다. 해상 세력 혹은 군진세력으로 불리었습니다. 이들은 귀족들의 반란에 이어 지방 호족으로 왕위 쟁탈전에 뛰어들었습니다. 이 세력의 대표 주자로는 완도에 청해진을 세운 장조 고를 들 수 있습니다. 신라의 무역선들을 보호하며 해상 세력으로 입지를 굳힌 장보고는 왕위 계승 전에서 패배하고 청해진으로 도피한 김우징을 적극적으로 도운 끝에 왕으로 만드는 데 성공합니다. 덕분에 공신이 되고, 내친김에 자기 딸을 왕비로 만들려다 이를 견제하는 중앙 귀족들에게 암살당하게 됩니다. 귀족 출신이 아니었던 장보고가 외척이 되는 것을 중앙 귀족들이 두고 보지 않았던 거 같습니다. 철저한 골품제 사회였던 신라는 신분간의 구별이 엄격했습니다. 완도의 장보고와 함께 진주의 왕보규, 송악의 작제건 등이 손꼽히는 해상 호족들이었습니다. 훗날 송악을 기반으로 고려를 세운 왕건이 자로 작제권의 손자였습니다. 세 번째 부류는 지방의 하급 군관이나 부농 중에 재산과 군대를 모아 지역의 지배자가 된 토착 호족들입니다. 하급 군관으로 서남해안을 지키다 점차 세력을 키워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이 대표적입니다. 이렇게 보니 호족의 세 부류인 몰락 귀족과 해상호족, 지방 토착세력등이 각각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최후의 승자는 해상 세력인 왕건이었습니다.

왕건의 달을 며느리로 맞은 인주 이 씨

고구려 유민이었던 왕건의 선조는 송악에 자리를 잡은 뒤 대를 이으며 세력을 키웠습니다. 할아버지를 거쳐 아버지인 왕융대에 이르러 송악에 기반을 두고 예성강 유역을 지배하는 호족 가문이 되었습니다. 국제 무역항인 벽란도가 자리 잡은 예성강 유역은 고려시대 무역의 중심이었습니다. 왕건 집안은 신라의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나 독자적인 사무역을 행하고 이를 바탕으로 재산과 군사력까지 갖추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왕융과 함께 궁예의 부하장수가 된 왕건은 서남해의 여러 전선에서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는 수군을 이끌고 후백제의 후방인 금성과 진도등을 점령했습니다. 이는 해상 호족이었던 왕건이 일찍부터 해전에 익숙했기 때문입니다. 왕건에 승리 덕분에 후고구려는 후백제와 중국, 일본 간의 바닷길을 막고 북부 내륙 전선에어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 공을 인정받은 왕건은 가장 높은 벼슬인 시중에 임명되었고, 궁예의 실정이 거듭되자 그를 쫓아내고 새 나라 고려를 세웠습니다. 왕위에 오른 왕건은 도읍을 자신의 본거지인 송악으로 옮겼습니다. 그러고는 주변 지역의 호족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면서 신생 국가의 입지를 다졌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왕건과 같은 해상호족이었은데, 그중에는 호족세력인 인주 이 씨가 있었습니다. 인주 이 씨 집안은 왕건의 딸을 며느리로 맞을 만큼 강력한 세력으로 인정받고, 고려의 후삼국 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인천 지역의 또 다른 호족 부평이 씨와 강화 위 씨

또 다른 인천 지역 호족으로는 부평이시와 강화 위 씨 가문을 들 수 있습니다. 이글 또한 왕건의 후삼국 통일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부평 이 시의 시조인 이희목은 태조에게 그 공을 인정받아 삼한공신으로 책봉되고 최고위 벼슬인 삼중대광에 올랐습니다. 후삼국 통일을 이룬 태조는 공신 책봉과 함께 각 지역 호족들의 성과 본관을 정해주는 정책을 시행합니다. 시조가 태어난 곳을 가리키는 본관이 생긴 덕분에 똑같은 한자를 쓰는 성시라도 여러 개의 본관으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정책을 토성 분쟁이라 하며, 고려 정부의 지방 지매권을 강화하는 동시에 호족 세력의 지역적 기반을 인정하는 조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희목 또한 이런 정책에 따라 공신에 책봉되고 부평이라는 본관을 받은 겁니다. 이후 부평 이 씨는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인천 지역을 대표하는 가문중 하나로 성장합니다. 강화도를 본관으로 한 강화 위 씨는 서해를 대표하는 해상 세력 중 하나였습니다. 고려 목종, 현종 대에 최고 벼슬인 문하시중에 오르는 위수여가 대표 인물입니다. 태조 때 보다 오히려 뒤로 가면서 가문이 더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강화 위 씨는 인천지역의 다른 대표 호족인 인주 이 씨, 부평 이 씨에 비해 남아 있는 기록이 적습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강화도에 위 씨 이외에도 최 씨, 황 씨, 고씨 등의 유력한 가문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